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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서 열린 전위예술가들의 퍼포먼스

상시 2018. 9. 11. 01:13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안동행위미술제 2부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로 찜닭집엘 갔는데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액자 속에는 위와 같은 문구가 삽입 돼 있었다. 그동안 몇 번의 안동문화예술회관 행사 관람을 하면서도 잊을 뻔한 안동의 '정신문화'라는 정체성을 각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퍼포먼스의 개방성과 확장성은 어떠한 관념이나 이념도 고착 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개성과 고유성을 침해하지 않으므로 '정신문화'와도 충돌하지 않는다. 이렇게 서둘러 정리해 보며 안동의 정신문화가 깃든 찜닭과 안동 막걸리를 마신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마시 듯 안동의 정신문화를 씹고 뜯고 맛보고 마신다.
새삼스럽지만 이미 온갖 미디어와 월드와이드웹이 지구촌을 엮은 세상, 안동 양반들과 서울 양반들의 차이는 얼핏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지방문화의 고유성과 자부심은 곳곳에 살아있었다.

유림의 고장 안동문화예술회관에서 무사히(?) 성료된 2018안동행위미술제는 올 여름 1부와 2부를 나누어 진행하였다. 안동 양반들을 모셔 놓고 진행한 전위예술가들의  '사랑♥아름답게' 에 관한 퍼포먼스 후기를 올리려고 한다.
안동행위미술제 기간동안 퍼포먼스와는 별도로 1회 때 부터 진행된 행위미술 실연 영상이 상영 되고 관련 책자와 작가의 이력에 의한 행위 사진이 대형 배너로 전시되고 있었다.

2018안동행위미술제의 주제 '사랑♥아름답게'를 사용하면서 이번만큼 '사랑'이란 말을 많이 써 본 것은 생애 처음이다. 쓰면서 사랑을 중얼거려야 했으니 입이 니글거리고 사랑이란 말을 생애 딱 한 번만 하겠다던 내가 가증스럽게 됐다. 사실 '사랑'이란 단어는 한때 종교 이상으로 내가 믿는 가치에 대한 최후의 보루였고 사랑에 관한 한은 '이상'을 원했었다.
그래도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를 공으로 수학할 수 있었고 성공적 '사랑'을 고르는데 일조가 됐을 것이다.

다음은 2부 작가들의 감상평이다.
참고로 실내에서 작품을 진행했던 1부 작가들과 달리 2부 작가들은 실외 옥상에서 실연할 계획이었으나 유례가 없는 올 여름 날씨로 인해 실내로 바꿨다고 한다.
작가마다 선호도가 다르겠지만 실내 공간만의 섬세하고 디테일한 전달력은 장점일 수 있을 것이다.

강성국 [몸시(몸으로 읊는 시)]
강성국 [몸시(몸으로 읊는 시)]ㅏ 직각의 벽에 전신으로 써 내려간 “내가 만약 자유로운 몸이였다면”이 남아있었다. 그에게도 뇌성마비라는 하드웨어로서의 장애는 현실로 남지만 정면을 향해 진검승부를 택한 것이다. ⓒ 오광해

<사랑의 기쁨이 이긴다>
강성국을 이야기 하려면 사족이 필요할 듯 해 보이지만 그는 닥치고 행위를 통해 한마디의 말도 없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자신의 전부가 노출된 채 사지를 펄럭이며 추는 발자국 춤을 따라들어가다 보면 문득 어느 별에 불시착해 미로를 즐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그의 등장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늘 그렇듯 비틀리며 세상을 기울이며 그럴 기분이 아닐 때도 휘적휘적 춤을 추며 마치 그가 밟고 있는 지구 표면이 둥글고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아무리 정성껏 디뎌도 그의 맨발은 조용하고 정당하게 찍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스스로 몸시(몸으로 읊는 시)라고 하니 왠지 너무나 이해가 쉬워서 미안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달성하지 못한 구애에 관한 아픔이라고 했지만 아픔이 아닌 '사랑이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 행위미술제의 주제가 '사랑♥아름답게'였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이내 현실로 왔다. 직각의 벽에 전신으로 써 내려간 "내가 만약 자유로운 몸이였다면"이 남아있었다. 그에게도 뇌성마비라는 하드웨어로서의 장애는 현실로 남지만 정면을 향해 진검승부를 택한 것이다.
그 내용을 풀어 나간 행위는 어렵지 않게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대상을 신주처럼 모시며 어느 한 곳도 쓰기 어렵지 않은 곳이 없는 신체로 커피를 타고 편지도 쓰고 시를 쓰고 자신의 모든 것과 껍데기마저 벗어 준다.
그러나 행위는 처절한 것이 아니라 기껍고 이것은 사랑의 기쁨이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춤을 추며 퇴장했다.

박경화 [나의 맨발]
박경화 [나의 맨발]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희망>몸을 던져 과거와 현재를 통째로 삭제 시켜도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희망, 이것이 마지막 죽음일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유혹에 시달릴 수 있을까. ⓒ 오광해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희망>
이 작가의 등장은 아름답다. 한 아름 가득 흰 장미가 아름답고, 하얀 테이블보가 아름답고, 싱그런 풋사과의 향도 아름답고, 작품의 설정은 아니겠지만 작가도 아름답다. 새장의 철사에서 빛나는 은광도 아름답고, 흰 대리석처럼 흘러내린 테이블보 주름의 음영도 아름답고, 새소리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 작가에게 안긴 꽃이 활짝 긴장하고 있었다. 환한 꽃 아름을 포란을 하듯 온 몸으로 품고 피부 깊숙이 풋 향과 차가운 가지와 한 몸이 되더니 한 몸도 부족했던지 파리한 맨 어깨와 등에 가시 꽃을 섞어 꽂아 신체를 화병으로 내어 주고 아예 자신과 일체를 넘어 세포화 시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퍼포먼스 주제인 '사랑♥아름답게'를 수행하려는 성실한 준비는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끝은 시작을 위해 있을 뿐이다. 한 몸이 된 건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피부가 된 꽃을 이젠 입으로 확인하고 결국 분신을 절개한다. 이별을 절개하고 싶었지만 생살 같은 사랑이 잘려 나갔을 지도 모를 일, 데미지는 크다. 큰일을 치룬 작가는 과장된 활보를 하며 자유롭게 고뇌한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작가의 머리칼 속 흰 뺨엔 미열이 있어 보였다. 몸을 던져 과거와 현재를 통째로 삭제 시켜도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 희망, 이것이 마지막 죽음일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유혹에 시달릴 수 있을까. 과연 '구원'이란 단어는 명사가 아닌 형용을 넘어 동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김은미 [사랑하기 좋은 날] 
김은미 [사랑하기 좋은 날] <아름다운 잔혹극>흰 드레스를 돕는 흑의 몸에 지닌 장미꽃과 잎은 돋보이고 원을 그리며 작가를 바라보는 장미들의 구도는 어둠 속에 눈부시다. 그러니 등장인들의 동선은 그대로 모바일 캔버스가 되었다ⓒ 오광해

<아름다운 잔혹극>
이번에는 '사랑♥'을 '아름답게' 시작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정성들여 물을 주며 꽃을 가꾸고 있었다. 실연 무대는 매우 회화적이다. 흰 드레스를 돕는 흑의 몸에 지닌 장미꽃과 잎은 돋보이고 원을 그리며 작가를 바라보는 장미들의 구도는 어둠 속에 눈부시다. 그러니 등장인들의 동선은 그대로 모바일 캔버스가 되었다.
꽤 오랫동안 돌 본 장미꽃을 자식처럼 자신의 가슴에 모두 안고 상대를 하나씩 안는데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면 으스러지게 안아서 심장까지 맞닿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뻔한 것이다. 놓칠 뻔한 진실은 이뿐이 아니다. 나는 원만한 실연을 위해 장미의 가시를 정성껏 제거했을 작가의 시간을 떠 올렸었는데 뜻밖에 가시가 달린 장미를 사느라 많은 노력을 했지만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작업 준비를 위해 하루 전 현장에 도착했었다는 전언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서늘했다. 잔혹극이었던 것이다. 짐작은 했어야 했다. 작가의 제목 [사랑하기 좋은날]에 "사랑은 아름답다"에 이어 "너무 사랑하기 좋은 날이라 슬퍼요//너무 아름다운 날 죽고 싶은 것처럼"을 읽었을 때 알아 봤어야 했다.
그러나 다시는 아픔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아프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일부인 장미를 나누어 준다.
아름다운 사랑은 반드시 아픔이 동반된다는 말이 뻔해서 안 믿고 싶었지만, 안 믿고 싶을 뿐이다. 그래도 바라건대 많이 아프지 않게 사랑이 더 많이 돌아가기를 바란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던가.

방효성 [채집 Collect (당신의 숨결을 채집합니다)] 
방효성 [채집 Collect (당신의 숨결을 채집합니다)] <무엇이든 채집 한다>작가의 착의는 미생물학자 같기도 하고 방역요원 같기도 하고 생체실험을 집행하는 의사 아닌 의사(퍼포머들은 감히 못 하는 짓이 없다) 같았다.ⓒ 오광해

<무엇이든 채집 한다>
작가의 착의는 미생물학자 같기도 하고 방역요원 같기도 하고 생체실험을 집행하는 의사 아닌 의사(퍼포머들은 감히 못 하는 짓이 없다) 같아서 오싹한 느낌까지 드는 것이었지만 다행히 채집만이 목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뉴스에서 종종 보듯 역사성이 강하고 의미있는 사물들을 담고 봉인하는 타임캡슐과는 좀 다른 것 같아서 아직 긴장을 풀 때는 아니다.
하필 80년대 동숭동에서 숨죽이며 봤던 연극 <Collector>마저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관객들에게 캡슐 안에 채집 물품을 자유롭게 넣어 달라고 했다. 나는 김은미 작가가 준 장미꽃 한 잎과 임택준 작가의 개인전 리플릿을 타임캡슐에 넣고 싸인을 했다. 나에게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다. "없으면 제가 임의로 채집 하겠습니다" 이 말이 결국 공포를 자아낸다. 관객의 목걸이를 핀셋으로 들어 올리며 머리를 갸웃거리며 궁리할 때도 그렇지만 손전등과 돋보기로 살피며 머리카락이나 체액을 수집할 때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거리고 있었다. 공격이 없고 해가 없어도 다가올 미래의 불안감은 공포와 견줄 수 있다.
오늘 분 쓰레기통을 엎어 놓고 핀셋으로 채집 물품을 고르는 장면은 컬트영화 촬영을 하듯 진지하고 드라마틱하기 까지 했다.
이쯤해서 봉인을 마쳤다면, 인문 과학 다큐로 마무리 되겠지만 쓰레기통에서 모은 잔여물에 음료수와 물을 머금고 헹군 다음 뱉고 마신 다음 장아찌를 담듯 밀봉해 두고 결국 끝을 냈다.
끝내고 보니 나의 감상은 편집증적 망상이 과했던 것 같았다. 작가는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관계 속의 모든 것, 마음과 생각까지 타임캡슐에 넣는 행위' 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광철 [예술씨앗 no 97(The Art Seeds no97)
김광철 [예술씨앗 no 97(The Art Seeds no97)] <공간을 흔들어 깨우며 시간을 채집하다>구획하고 확장한 환경에서 종이컵에도, 작가의 몸에도 LOVE를 써서 키우는데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폭력의 도구인 주먹(정권)에도 ‘LOVE’는 자란다.ⓒ 오광해

<공간을 흔들어 깨우며 시간을 채집하다>
작가는 작품 소개를 간단히 하고 관객 앞에서 슬링백을 열어 테이블에 다양한 물건들을 꺼내 놓기 시작한다. 우리 집에서도 흔히 보이는 허접한 잡동사니였다. 그런데 이것이 작가에게는 예술이 되는 오브제였던 것이다.
이런 평이한 일상 도구들을 현란하게 사용한 그의 퍼포먼스는 그래서 이물감이 없고 단단해 보인다. 그간 내가 봐 왔던 바로는 특이하거나 위압적인 분장을 잘 하지 않고 거의 평상복 그대로 작업을 하지만 그의 퍼포먼스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대신 1초 단위 시간의 흐름도 시각화는 물론, 회화화 하고 기록까지 하는 치밀함으로 권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만나는 모든 사물에 사랑이라고 부를 때 사랑은 도처에 자라나고 음악이 번져 나가고 그가 춤을 추면 종이컵도 따라 춤을 춘다. 그를 바라보는 만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다만 리듬을 놓치지 않도록 적재적소의 필요한 계량과 공급을 잊지 않고 몸을 어떻게 움직여도 드로잉으로 남는 것은 행위의 좋은 성과다. 특히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련성을 밝힌 것처럼 시간의 기록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사운드는 랜덤이 아니라 사물을 깨울 때 <Love me tender>를 깔고 <Allways on my mind>에 춤을 추었지만 춤을 출 때 이 노래가 나온 것이어도 상관없고 더불어 엘비스를 불러내 준 것이다.
구획하고 확장한 환경에서 종이컵에도, 작가의 몸에도 LOVE를 써서 키우는데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폭력의 도구인 주먹(정권)에도 'LOVE'는 자란다.

임택준 [떠도는 사람]
임택준 [떠도는 사람] <관계의 연결 또는 침투>급기야 자신의 입만 남겨 두고 오랫동안 얼굴을 감기 시작했는데 과거형 소멸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은 왜 긴 것인가를 실시간으로 실연해 보인다.ⓒ 오광해

<관계의 연결 또는 침투>
임택준 퍼포먼스의 화려한 스펙트럼과 아우라는 작업을 위한 연구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퍼포먼스에 대한 이력도 길지만 작업을 놓고 놀고 있을 때도 그의 일상은 왠지 작업의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차를 마시며 놀 때나 길 가다가 돌멩이 하나를 만질 때도 그의 행위는 작업과 같았기 때문인데 매니악한 오디오에 대한 애정과 만물과 놀고 싶어 하던 당시 그의 아파트에는 '벼룩시장'이 통째로 들어있었다
오랜만의 최근 작업을 보게 되었다. 스펙터클한 화면 구성 보다는 구체화된 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장비를 주로 사용해 표현하는 것도 변화로 보인다. 살아온 몸짓과 관객을 바라보며 전하려는 직접 화법은 독화술이나 은유, 상징을 좋아하던 작가에게는 더 큰 변화로 보인다.
LOVE를 크게 쓰고 시작은 하지만 사랑을 만들기 위한 실전은 녹록치 않음을 경고하듯 관객을 바라보고 서 있는 작가의 선글라스 속으로 서늘한 전사의 비장함이 스치운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줄 한 타래를 발로 차며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알겠느냐는 듯 "여기, 저기" 하며 어지럽게 쳐 놓은 줄을 사랑처럼 관계처럼 끊었다 이었다……
급기야 자신의 입만 남겨 두고 오랫동안 얼굴을 감기 시작했는데 과거형 소멸이 아니라 고통의 시간은 왜 긴 것인가를 실시간으로 실연해 보인다. 설마 취향적 SM을 즐기거나 아니면 사랑이 한 더께씩  쌓이는 것을 표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제법 긴 시간을 사용해 목에 걸린 독사를 털어 내듯 줄을 풀어서 마무리 했으니까.

관계의 연결인가 관계의 침투인가. 사랑의 결속과 결박.
연결된 사랑의 끈은 칭칭,
어느듯 결박으로 조여 오기 시작한다.

지시문이 없는 직관적 퍼포먼스는 정석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퍼포먼스도 정답이나 정형을 원치 않는다. 약속된 기호를 찾는 일도 아니다.
이번 나름의 소견은 내가 본 만큼이고 '나는 이렇게 보았다'가 될 것이다.
더 깊이 묻혀있는 진위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