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위라는 이름으로
내가 전위라는 이름으로 만든 단체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무세중 씨가 이끄는 반 연극 축제 Anti-Theater Fest 의 83’ 청년 전위 예술제를 통해서였다.
이 연극(?)을 보기 위해서 공연 기간 1주일을 통째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몰입을 했는데 전위적 예술이나 새로운 예술 사조에 대한 관심 보다는 답답한 현실의 출구를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찾으려는 방법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익지 않은 철리(哲理)와 그만그만한 용(치)기로는 정치적 현실이나 돌아앉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답을 얻지 못해 정신세계사류의 책이나 종교(사이비 종교 포함)적 편력과 탐방도 서슴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이때의 '전위'로서의 명칭은 장르 적 일탈과 탈 관념의 확장성을 구경 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아방가르드나 개념미술이나 퍼포먼스 같은 교과서 적 용어가 용해되어 내 현실을 위로해 주고 용기와 대안이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답답한 학습 부진은 이론과 실제를 다시 배워야 하고 상상력과 독창성을 없애주는 주입식 제도 교육의 논하지(토론할 줄 모르고) 않고 따지지(따질 줄 모르고) 않고 통치하기 적당한 국민을 만드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교육의 틀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모범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83년 전위극을 만난 계기로 동숭동에서 퍼포먼스를 처음 보게 되었다
조금 극단적 표현을 하자면 그동안 우리가 꿈 꿔 왔던 희망과 미래의 질서가 위선과 허위의 장막 속에서 독버섯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 이것이 퍼포먼스가 주는 일격이었다.
표현의 전위성은 태고의 원초적 몸짓과 동시 공존하며 이것을 일상의 발견처럼 볼 수 있고 초 현실을 현실에서 만나듯 시공을 넘나드는 실험적 경험 또한 이 행위예술에서 볼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다.
진짜란 말을 수 없이 반복해야 진짜로 알아먹고 언어는 점차 경음화 되어 가고 ‘너에게 만’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어서도 안 되는 기괴한 소통 세상에서 인플레 된 외로움이나 눈물도 싸구려 소품이 되고 종교와도 같던 순수나 사랑이라는 말은 때가 묻고 닳아서 더 이상 쓸 수 없는 판에 퍼포먼스 적 행위는 진실에 앞선 리얼 기정사실 상황 날 것 그대로에서 시작하며 보여준다.
그러나 필연을 위한 진실에 답을 구하거나 제시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희망과 종말을 제시하는 종교성과의 차별이며 인간을 향한 미래며 희망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그 어떤 단편 적 결론도 퍼포먼스의 올바른 정의는 아니다. 살아있는 진행형은 정의나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퍼포먼스는 전위적 긴장과 적확한 이해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최근 까지 홍대에서 KOPAS 가 개최한 한국실험예술제는 설레며 일 년을 기다리게 하는 행사 중의 하나다. 장장 1주일 여 동안 국내의 중견 작가는 물론 세계의 퍼포머들이 세상에서 단 한 번의 행위로 진실을 토해 내는 열기와 행사 때 마다 볼 수 있는 작가들과의 만남과 무엇보다 통쾌하게 권태를 날려줄 종합선물 같은 '꺼리'를 선사한다.
권태와 속병을 해소할 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도 끝도 이유도 없는 이뭣고와 화두를 들 수도 있고 오늘 죽을 일을 내일로 미루고 죽고 싶지 않을 만큼의 호기심만 생겨도 이 짧은 시간은 찰나와 억겁을 경험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술로 묻고 술로 답하는 인류들에게 이 시간만큼의 술을 덜 수 있다. 하긴 끝나면 술 생각이 왈칵 나기는 하지만.
이 정도 구경거리라면 비용을 걱정하고 각오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공짜다.
(아주)가끔 자발적 모금도 있기는 하지만 탁발하는 자와 주는 자의 갈등이 없듯 이 모금함은 교회에서 돌리는 성금 바구니 보다 얌전하고 고맙다.
그러니 오래도록 종교를 갖지 못한 내가 퍼포먼스에 은혜를 받아 주변 지인들을 향한 전도를 일삼을 수밖에 없고 한 번 다녀간 사람은 다음 기회엔 자녀와 함께 올 것을 맹세하는 이들도 볼 수 있다.
퍼포먼스는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십여 년 산 전주에서도 매(!) 년 행사가 벌여져 친숙해진 작가들과 작품을 만나면서 타향살이와 텃세를 극복하는데 적절히 일조를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중앙 집중화 돼 있는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방색과 다양한 문화 고취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행사임에 틀림없다.
이런 행사에 내가 제일 혜택을 많이 본 것 같아 전주 퍼포먼스를 이끄는 심홍재 퍼포머에게 부채 의식이 있는데 끝나면 술까지 사준다.
이번 안동 행사를 견인한 이혁발 작가도 여기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안동 행위예술제의 퍼포먼스는 특별해 보인다
각 지방에는 고유의 지방 문화와 색이 있지만 안동 하면 떠오르는 전통과 양반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된 중소 도시에서 어감조차 요상한 퍼포먼스에 몸이니 살이니 하는 이물질을 어떻게 소화할 지 자못 긴장감 마져 드는 것이다.
게다가 퍼포먼스를 안동에 첫 소개하는 이혁발 작가는 소수의 마니아 층 외에는 공개적(!)지지를 못 받는 감추어진 몸과 욕망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에로틱 연구 선동가이기 때문이다.
이혁발, 전위적인 그의 이름을 의심했지만 본명이 틀림없는 타고 난 이 시대의 가장 적나라한 전위 작가 그가 사는 곳이며 고향이 안동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작가라고 말하면 어떤 상상을 할 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꿈이 당면한 문제를 꿈으로 꾸어 넘기거나 초 현실로 피신하지 않으며 회피하거나 우회하지 않을 뿐 더러 그 화두를 소품으로 만들어 안방에 두고 늘 함께 산다.
그는 몽상가가 아니다.
전위성과 병존하는 의외의 전통성과 고지식한 보수성은 불가사의 해 보이지만 열린 개방성으로 토피아 적 이상 세계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지상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전통과 보수성도 유용한 자산이 될 수 있으므로 실존보다 더 실재하는 현실을 만들 수 있는 적임자다.
여기에 자료가 일천한 한국 퍼포먼스와 작가를 총 망라하고 정리한 책을 쓴 치밀한 이론도 결코 장식이 아닌 그가 꿈꾸는 세상 ‘육감도’의 밑그림이며 초석이다.
그동안 내가 감동과 은혜를 받은 작품과 퍼포머들은 매우 많다.
안동 행사의 작가 중에서만도 십여 년도 더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뵌 영화십계명(선생님의 사인이 든 선언문을 모세의 십계명처럼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을 선언하셨던 성능경 선생님은 지금도 허약한 젊음을 향해 크레이지를 휘두르는 가장 전위적 청년이시다. 잠언이나 경전을 인용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행사에 맞는 법어를 완성해 오시며 입으로 충고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현재 몸을 먼저 실험 도구로 내 놓는다.
그리고 국내 퍼포먼스의 중추다운 획이 큰 작품들과 핵심이 간결하지만 때론 장엄한 버라이어티도 놓치지 않는 홍대 실험예술제를 이끈 KOPAS의 김백기 대표.
어떤 상황의 부조리나 절망도 그가 천연덕스럽게 결속하거나 해부하면 '낭만적 허무'로 유행에 질긴 춤을 추며 건널 수 있는 사람, 주제의 변주나 요약이 탄탄한 광주의 김광철 작가 등등.
일일이 열거하며 적어 본다는 것도 이 지면의 할애와 취지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이혁발 작가의 소견을 적어 본 것은 그 자신의 오랜 실천과 삶을 보았고 이번 안동에서의 행위예술제를 소개했고 성과 부분은 설령 내용이 만족할만한 이해가 아닐지라도 다양성이란 측면에 의미를 둔다면 모든 열린 생각의 단초가 될 수 있는 다양성은 매우 중요하므로 그에겐 척박한 안동 땅에 기꺼이 한 알의 씨(!)를 떨어뜨릴 것이다.
각종 매체의 공연이나 무대가 식상하다면, 심지어 좋아하는 것이나 생각으로 부터도 지쳤을 때
오직 여기 지금에 존재하는 그러므로 퍼포먼스로 불리울 뿐 퍼포먼스가 아닐지도 모르는
어디에도 간주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는 '이것'이 존재한다.